안녕하세요!
일단 씩씩한 인사로 시작해 봅니다.
일기를 쓰려고 했는데 왜 편지를 쓰는 기분이 들까요?
아마도 그건 앞으로 이곳에 쓰게 될 글이 '진짜' 일기가 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겠죠.
누군가에게 보여질 것을 전제로 쓰는 글에서 완벽하게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건 단순히 용기의 문제만은 아닐 거예요. 용기를 내는 일은 오히려 쉬워요. 때로는 재미있고 짜릿하기까지 합니다.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요?
계산.
제가 완벽하게 솔직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늘 계산입니다.
저는 계산을 좋아합니다. 아, 물론... 32912 나누기 2543 같은 계산은 아니고요... 그런 계산에 유능했다면 인생이 조금 더 잘 풀렸을 텐데 아쉽게도 저는 숫자와 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계산은 이런 거예요. 득과 실을 따져 보는 것. 가능성을 예측하는 것. 이것저것 요리조리 재고 따지는 것. 이 글을 쓰기 전에도 이런저런 계산을 했어요. 개발자 세계(지금의 저에게는 토성이나 목성처럼 멀고 아득하게 느껴지는...)에 편입하려면 네이버보다는 티스토리랑 친해져야겠지? 혹시라도 나중에 입사 지원서에 블로그 링크를 쓰게 된다면 그게 더 있어 보일 거야. 아무리 일기라도 미래의 면접관과 동료들이 보게 될 수 있으니 존댓말로 쓰는 게 낫겠지? 예전부터 해왔던 진짜 블로그에는 너무 날것의 내가 담겨 있으니 철저하게 분리하는 게 이득일 거야. 그런 계산 끝에 티스토리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아직 낯설고 어색하네요.
어제는 듀듀와 호텔에 다녀왔습니다. 듀듀는 제 오랜 친구인데요, 세상에 얘만큼 저를 잘 아는 사람은 또 없어요. 제 소개를 하기 전에 듀듀를 소개하고 싶어요. 문과 출신 1년차 개발자. 네, 그거요. 누군가는 무시하고, 누군가는 조롱하고, 누군가는 비웃고... 하지만 누군가는 응원하고 격려하는 국비 출신 개발자요. 사실 저희는 작가예요. 몇 권의 책을 출간했고, 함께 나간 공모전에서 대상도 받았고, 지금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각자 계약한 원고를 쓰는 작가들입니다. 그런데 얘가요, 2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코딩을 배우겠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냥 하는 (개)소리인 줄 알았어요.
"야, 아무래도 글 써서 먹고살긴 힘들 것 같아. 뭐라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 시절 저희는 틈만 나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뭐라도'는 자주 바뀌었습니다. 코딩에서는 이걸 '변수'라고 한다면서요? 제가 가진 변수의 목록은 이랬습니다. 줄눈 시공, 입주 청소, 전통 한과 만들기, 영상 편집/디자인, 병원 홍보 마케팅... 그리고 코딩 역시 그중 하나였어요. 별생각 없이 막 던져보던 후보였는데... 이런저런 인생의 풍파를 겪으며 각성한 듀듀가 진짜로 코딩 학원에 등록해버린 날에도, 웃다가 울다가 하면서 수업을 듣던 시절에도, 파이널 프로젝트 결과물을 자랑하던 때도, 심지어 면접에 합격해 예비 개발자에서 진짜 개발자가 되던 날에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제 계획에 없던 일이었어요.
어제 코딩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내가? 진짜? 코딩을? 정말?? 아니 근데 코딩이 뭔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물음표를 지워 버린 건 듀듀의 한 마디였어요. 호텔 침대에 누워 새벽까지 목이 쉬도록 수다를 떨다가 나온 말이었습니다.
"다정아, 너한테는 선택지가 없어."
네, 드디어 저에 대해 소개할 때가 왔네요.
본명은 '현'이지만 마음에도 없는 다정한 척(어디까지나 '척'이라는 게 웃음 포인트인데 설명하려면 너무 길어지니 일단 스킵합니다)을 잘해서 '다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저에 대해서요. 34살(만 나이로 32살이라고 해주세요...), 여자, 초대졸, 예체능(영화연출). 프리랜서 작가와 강사로 애매하게 잘 풀리는 바람에 똘똘한 직업을 가질 시기를 놓쳐버린, 하지만 각종 서비스직과 유/아동 관련 경력은 꽤 빵빵한... 이런 상태를 뭐라고 하는지 최근에야 깨달았습니다. 어... 음... 죄송한데 비속어 한 번만 써도 될까요?
커리어 개꼬였다.
이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게 지금의 저입니다. 듀듀의 말이 맞아요. 저한테는 선택지가 없어요. 들쑥날쑥 안정적이지 못한 프리랜서 생활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서비스직은 이제 쳐다보기도 싫고, 부모님은 노후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로 중년에서 노년으로 가는 길목에 있고...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듀듀는 일찍 현실을 깨닫고 벌써 1년차 개발자가 되어 제법 안정을 찾았는데 저는 아직도 헤매고 있더라고요. "나는 니가 왜 안 하는지 모르겠어. 너 지금 다른 대책 있어?" 더 늦기 전에 당장 코딩을 배우라고 등 떠미는 듀듀의 말을 오랫동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왜냐고요? 어... 음... 정말 죄송한데 비속어 딱 한 번만 더 쓸게요.
코딩이 졸라 어려울 것 같아서요.
"내가 할 수 있을까?"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묻는 제게 듀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제 할 수 있을까는 없어. 어떻게든 해야지, 그것만 있는 거야. 내가 보기엔 너 이거 적성에 맞아." 새벽 내내 듀듀는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던져주며 저를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침이 되었을 때... 저는 근거 없는 용기와 자신감이 머리끝까지 찰랑찰랑 차오른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학원 오픈 시간이 되자마자 전화를 걸어 당일 상담 예약을 잡았어요.
코딩이 좋아서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이 세계에 뛰어든 제가 불경스러운 뉴비처럼 보이시나요? 어쩌겠어요, 그게 사실인데요. 코딩을 배우기로 결심한 이유를 예쁘게 포장하지 않는 것 역시 나름의 계산 후 내린 결정입니다. 코딩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이 1순위인 사람을 찾고 계신다면 아마 저는 아닐 거예요. 물론 앞으로 사랑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저는 코딩보다 저를 사랑합니다. 저는요, 사랑하는 저를 지키기 위해 공부할 거예요.
앤디 위어의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는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아득한 우주로 떠나는 한 과학자가 등장합니다. 그를 태운 우주선의 이름은 '헤일메리(HAIL MARY)'입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헤일메리라는 말을 처음 접했어요. 이 단어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1)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주 낮은 성공률을 바라보고 적진 깊숙이 내지르는 롱 패스를 뜻하는 미식축구 용어.
2) 버저가 울리는 순간 득점할 것을 노리고 먼 거리에서 던지는 슛을 뜻하는 농구 용어.
코딩을 배우기로 결심한 게 제 인생의 헤일메리라고 하면 너무 과한 의미 부여일까요?
한 시간 가량의 상담을 마치고 학원을 빠져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우산이 없어서 지하철역까지 비를 맞으며 걸었어요. 나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지금 이 상황이 꽤 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구를 구하는 작전이었던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스포 주의!!!) 열린 결말이라 분명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성공으로 막을 내립니다. 내년 이맘때쯤, 저의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어떤 결과를 내게 될까요? 저는 과연 저를 구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일이겠지만 지구를 구하는 것보다는 쉽겠지요.
그 과정을 여기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